
부산현대미술관 <열 개의 눈>
Spectrums
2025.5.3 - 9.7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체적, 정신적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 각 사람은 다양한 방식을 사용한다. 이것은 취향에 따른 것이기 보다는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 조건, 주변 환경에 따라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스펙트럼스Spectrums에서는 감각의 제약을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이용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자신들만의 도구 열 가지를 소개한다. 누군가에게는 나무 막대기가 스위치를 누르는 손과 같은 도구다. 좌식 생활을 하는 누군가에게는 회전 의자가 실내에서 주요 이동 수단이다. 누군가에게 추억을 기록하는 방식은 눈으로 확인하는 사진이 아닌 귀로 듣는 음성 녹음이다.
사람들이 이처럼 자신의 고유한 상황과 필요에 맞춰 도구와 방식을 선택하고 그것이 효율적이고 실용적일 때 그 방식은 그들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선택이 된다. 이러한 다양성은 인간의 적응력과 창의성을 보여준다. 또한 우리가 환경과 도구를 디자인할 때 얼마나 포괄적이고 다양한 관점을 고려해야 하는지를 일깨운다.
펜
“팔과 손의 힘조절이 자유롭지 않아 그림을 그릴 때 아쉬움이 많았었는데, 저만의 방법을 찾았어요. 창문을 열면 보이는 게 하늘이었어요. 자꾸 보니까 꼬인 선을 이용하면 표현이 잘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죠. 그 때부터 펜으로 선을 꼬아서 그리기 시작했어요.”
한희수 | 뇌병변 장애인
접이식 흰 지팡이
김효정 | 전맹 시각장애인
“이 지팡이는 남들이 보지 못했던 저의 혼자만의 시간을 다 지켜봤잖아요. 저에게는 친구같은 존재죠. 아마 이 친구가 없었다면 저는 혼자 그렇게 낯선 땅에서 걸어다닐 수 없었을 것 같아요. 유럽뿐 아니라 일본, 중국, 태국, 필리핀 그리고 미국까지 혼자 낯선 도시를 걸어다닐 수 있게 만들어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 친구예요.”
점자악보
김은비 | 전맹 시각장애인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8번 1악장부터 4악장까지의 점자 악보예요. 저는 음표를 암기해서 박자 안에 몇 개가 들어가는지 외워서 쳐야하니까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거든요. 그래서 10년 전 대학교 편입할 때 이 악보와 오랜 시간 함께 했었죠. 여기 제 삶이 담겨 있어요. 이 곡이 나름 특별한 곡이다보니 연습했던 다른 악보는 거의 버렸는데, 이건 못버리겠더라고요.”
아대
탁용준 | 지체장애인
“처음에 재활병원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기구를 하나 만들어줬어요. 마치 복싱글러브처럼 큰 부피를 팔에 장착해야 되서 무겁고 들기도 힘들었죠. 그래서 입으로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다가, 어느날 갑자기 ‘테니스 아대를 손에 끼고 그 사이에 붓을 끼우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실제로 해보니까 재활병원에서 만들어준 것 보다 월등히 가볍고 좋았어요. 그 뒤로 그림 작업에 진전이 되기 시작했죠.”
트럼프 카드와 오델로
김희정 | 전맹 시각장애인
“제가 아이들과 많이 못 놀아줬어요. 밖에서 공차기나 게임을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트럼프는 네 식구가 함께 할 수 있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죠. 주로 원카드 게임을 했는데 엄마도 시각장애인이니까 넷이 같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게임이었어요. 오델로는 주로 둘째와 했는데, 아이가 머리 쓰는 걸 좋아해서 이걸 자꾸 하자고 가져오더라구요. 이길 수 있는데 져주고 하면 아이가 좋아 했거든요. 저에게는 아이들이 성장하는 동안 같이 할 수 있는 의미있는 도구였다고 생각합니다.”
녹음기
김희정 | 전맹 시각장애인
“우리 둘째가 어린이집을 다닐 때 집에 와서 갑자기 노래를 부르더라고요. 잽싸게 가져와서 녹음을 했죠. 그 때가 여섯살인가 일곱살 때인가 그렇거든요.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저랑 제 아내가 눈으로 볼 수는 없으니까 목소리를 날짜별로 정리해왔어요. 아이들의 성장 과정을 날짜별로 정리한 소리로 된 일기라고 해야할까요? 우리 식구 전체의 추억이 이 안에 들어있어요.”
효도의자
전상실 | 지체장애인
“생활하다보면 욕실에서 하는 일이 많잖아요? 양치도 하고 세수도 하고, 실내에서 이동하는 데 없어서는 안되는 물품이죠. 제가 혼자 욕실에 들어가서 할일을 할 수도 있고, 때로 저에게는 한 부분의 활동 지원사 선생님 같아요.”
무선키보드
임서희 | 청각장애인
“무선키보드는 소통의 징검다리 같은 존재예요. 글씨로 소통하는 ‘필담’에서 이 친구만큼 든든한 존재도 없죠. 노트북을 사이에 두고 무선키보드로 문자를 타이핑해 나누는 순간들이 참 소중해요. 농인들은 수어로 영상 통화를 자주 하다보니, 전화가 갑자기 걸려오면 빠르게 핸드폰을 거치할 곳이 필요한데 이 키보드 덕분에 언제든지 영상 통화를 할 수 있어요. 제가 친구들과 언제든 편하게 마음을 나누는 통로입니다.”
나무 막대기
전상실 | 지체장애인
“원래는 마크라메할 때 쓰는 막대기라고 하더라고요. 7~8년 전 어느날 길을 가는 데 얘가 그냥 눈에 들어왔어요. ‘아, 나한테는 팔이 되고 손이 될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죠. 불을 켜고 끄고 물건을 끌어 당기고 여러가지 용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손거울
“손거울은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물건이에요. 휴대폰이 없던 시절, 버스를 타고 가며 뒷자리에 앉은 친구와 손거울을 통해 눈을 맞추면서 수어로 대화를 나누고는 했어요. 요새는 영상통화가 일상이 되었지만, 자동차 룸미러로 뒷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여전히 우리는 거울을 통해 소통하고 있죠. 손거울은 우리 사이의 따뜻한 연결고리로 남아있어요.”
임서희 | 청각장애인